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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강감찬장군 (948~1031)

강감찬 장군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은 정종 3년에 금주 즉 현재의 봉천동(218-14)에서 삼한벽상공신 궁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장군의 처음 이름은 은천이다. 학문을 좋아하며 983년(성종 2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고 저서로 "낙도 교거집"과 "구현집"이 있다.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고려에서는 강조가 30만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다 패하여 많은 신하가 왕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예부시랑으로 있던 강감찬 장군이 항복을 반대하여 위난을 면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18년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소배압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케했으나 고려는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적케하니 장군은 홍화진의 물을 막아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퇴각하는 적에 귀주에서 대첩을 거두니 이 귀주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충무공의 한산대첩과 함께 청사에 길 이 남는 승전으로 손꼽힌다. 이 공으로 장군은 "추충협모안구공신"의 호를 받았다. 장군은 그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030년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검교태사시중천수군 개국후에 봉해졌다. 현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수태사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으로 숭의전 사당에 배향되어 있으며, 1974년에 낙성대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 하면서 장군의 일대기를 적은 "강감찬 장군 사적비"를 세워 장군의 애국충정과 호국의 얼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강홍립 장군(1560~1627)

강홍립 장군

강홍립 장군은 명종 15년(1560)에 출생하여 인조 5년(1627)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군신이요, 호는 내촌으로 본관은 진주이다. 우의정 사상의 손이며 참판 신의 아들이다. 선조 22년(1589)에 진사가 되고 1597년에 알성문과로 급제하여 설서, 검열을 거쳐 선조 38년(1605)에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이 되었고, 같은 해 진진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관악이라는 이름이 서울특별시 행정 기구의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62년 11월 21일자 법률 제 1172호로 1963년 1월 1일부터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새로 편입된 지역의 행정처리를 위해 출장소를 설치하면서 그 명칭을 "관악출장소"로 명명하면서 부터이나, 우리나라 지방행정구역의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73년 3월 12일자 대통령령 제6548호로 동년 7월 1일, 지금의 관악구를 비롯하여 동작구와 서초구 지역 일부를 영등포구에서 분리, 별도의 구를 신설하고 "서울특별시 관악구"로 명명하면서 부터이다.

현재까지 관악구 지역의 지명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서적은 현존하는 모든 한국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는「삼국사기」이다. 이 책의 지리지(地理誌) 4권 가운데 고구려 지명이 실려 있는 券 三十五와 三十七에 기록되어 있다.

신위선생(1769~1845)

신위선생

신위선생은 영조 45년(1769년)에 나서 헌종 11년(1845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말기의 학자. 자는 한수, 호는 자하,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렀고, 14살 때 정조가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크게 칭찬하고 사랑하였다. 정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한시문학에 있어서 조선 500년 제일의 대사로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난 삼절로서 필묵의 천재였다. 조선개국 이래 시작(試作)이 가장 많았으며, 100년 이후의 시인들도 그를 시작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필법 화법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러 그가 쓰고 그린 종이조각 하나라도 보배로서 전하여지고 있으며, 아들 명연은 호를 애춘이라 하였는바, 아버지의 유고를 수집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역시 삼절로서 이름이 있었다. 자하가 지은 책으로는 ≪경수당전고≫ ≪분여록≫등이 있다.

신위 선생은 자하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풍류시인이면서도 천성이 호탕불기하여 호협무비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어린시절 보시(補試)에 응하고자 열석하여 시권에 글을 쓰다보니 마침 중천에 달이 떠오르는지라, 공은 자기가 보시중임에도 잊고서 그 시권에 다 보비영출한 필법으로 묵죽(墨竹) 한폭을 그리니 시보하던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필법에 놀랐다고 한다. 선생의 묘는 관악산에 있었으나 서울대학교 이전시 충북 장호원으로 이장하였다.

정정공 강사상(1769~1845)

정정공 강사상

강사상은 중종 14년(1519년)에 태어나 선조 14년(1581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조의 문신이며, 자는 상지, 호는 월포, 시호는 정정공, 본관은 진주이다. 강사상은 24세가 되던 1543년(중종3년)에 사미시에 합격하고 28세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7년(명종12년)에 동부승지, 좌부승지, 부제학을 거쳐 1559년(명종14년)에 도승지가 되었고, 1561년(명종16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즉위 후 대사헌이 되어 실록청 동지관사로「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고, 1570년(선조3년)에는 중궁고명 중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4년(선조7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2년 후에는 우참찬을 지냈으며, 이조·형조·호조·병조판서를 두루 거친 후 1578년(선조11년) 우의정에 올랐다.
1581년(선조14년) 영중추부사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정정공의 신도비는 현재 서울시 관악구 난곡동 107-2호(난곡)에 있는 선영에 있는데 400여 년 동안 이어 내려오는 중요한 유물로써 1997년 12월 31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받았다.

효민 이경직(1769~1845)

효민 이경직

신위선생은 영조 45년(1769년)에 나서 헌종 11년(1845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말기의 학자. 자는 한수, 호는 자하, 본관은 평산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렀고, 14살 때 정조가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크게 칭찬하고 사랑하였다. 정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한시문학에 있어서 조선 500년 제일의 대사로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난 삼절로서 필묵의 천재였다. 조선개국 이래 시작(試作)이 가장 많았으며, 100년 이후의 시인들도 그를 시작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또한 필법 화법 모두 신의 경지에 이르러 그가 쓰고 그린 종이조각 하나라도 보배로서 전하여지고 있으며, 아들 명연은 호를 애춘이라 하였는바, 아버지의 유고를 수집하여 책을 만들었는데, 역시 삼절로서 이름이 있었다. 자하가 지은 책으로는 ≪경수당전고≫ ≪분여록≫등이 있다.

신위 선생은 자하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풍류시인이면서도 천성이 호탕불기하여 호협무비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어린시절 보시(補試)에 응하고자 열석하여 시권에 글을 쓰다보니 마침 중천에 달이 떠오르는지라, 공은 자기가 보시중임에도 잊고서 그 시권에 다 보비영출한 필법으로 묵죽(墨竹) 한폭을 그리니 시보하던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필법에 놀랐다고 한다. 선생의 묘는 관악산에 있었으나 서울대학교 이전시 충북 장호원으로 이장하였다.

관산 조철호(1890~1941)

독립운동가. 고종 27년(1890년) 경기도 시흥군 동면 난곡리(현 서울시 관악구 난곡지역)에서 출생하였다. 구한말 무관 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중위가 되었다.

1911년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뒤, 1914년 상하이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뒤에 가출옥되자 중앙고보 교사를 거쳐, 1921년 베이징에서 열린 극동 잼버리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년 운동에 뛰어들어, 1922년 조선 소년군을 만들었으며, 그 후 1926년 6·10만세운동에 관련되어 북간도로 망명하였다가, 1932년 다시 체포되었고, 1938년 조선 소년군이 강제 해산되면서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풀려 나온 뒤 1940년에 보성 전문 체육 강사를 지냈다. 청소년에게 건전한 시민정신을 심어주고 다양한 야외생활 기술개발이 한국에서는 1922년 10월에 조철호(趙喆縞)가 구국 청소년 운동을 목적으로 중앙고보와 배재학교 학생 8명으로 창설한 조선소년군과 비슷한 시기에 정성채(鄭聖菜)가 발족한 조선소년척후대를 전신으로 시작되었다.

이 단체들은 1924년에 이상재(李商在)를 초대 총재로 하여 하나로 통합되었다가 1937년 9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으나 1946년 3월 사단법인 대한보이스카우트로 재발족하였다.